Noh HaeYul | 환치된 조각의 본성에 대한 탐미 -작가 노해율 작품에 대한 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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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치된 조각의 본성에 대한 탐미 -작가 노해율 작품에 대한 소론

글|홍경한 (미술평론. 한국문화경영연구원 강사)

1.
조각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삼차원의 공간 속에 형태 (form)와 색(color), 양감(volume)과 볼륨(volume)을 지닌 구체적인 물질로서 강하고 견고한 입체적 구성체’라고 정의되어진다. 하지만 ‘소조하거나 뜨고 깎고 자르고 용접하는’ 전통적인 조각 개념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50~60년대를 지나 70년대를 넘어서면 이 같은 정의는 더 이상 충분한 설명을 함유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근대에는 일본이나 서양에서 공부한 지식인들에 의해 답습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지만 80년대부터는 눈부시게 발달한 산업기술에 힘입어 조각의 영역(미술의 표현 영역)은 더 이상 고정적인 입체덩어리가 아니게 되었다. 흙, 돌, 나무 등 일차적으로 머물렀던 소재는 무궁하게 확장되었고 회화와 사진, 영상, 설치 등 예술 장르 간의 범주가 불분명해지는 탈장르 현상이 일어나면서 나타난 다양한 현상들을 담아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마르셀 뒤샹이    ‘레디메이드 (오브제)’라는 혁신적인 개념을 전파하며 보여준 장르 혹은 개념의 전환은 미술이 지닌 기존체계에 완전한 반발을 불러왔다.   전시의 대상이 설사 기성품일지라도   작가의 시각에서 예술로서 인정하고 이를   전시장에 전시함으로서 예술이 완성된다는 논리는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하기만 했다 . 또한 러시아의 조각가 블라디미르 타틀린이 기술적 구조의 공간에 기능적인 여러 조건을 추상적인 모형으로 전개함으로써 기계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거나 ‘코너-카운터 릴리프’라는 제작 방식을 개발한 이후엔   전통적인 조각이 누려온 ‘정의’는 무효해졌으며 이 자리엔 미술, 나아가 표현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본질적인 질문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반세기 동안 무한증식과 자가 분열을 거쳐 현대에 이르게 된 조각은 이제 소재 범위의 확대는 물론 대상에 대한 확장을 가져왔으며 그것은 곧 특정적인 가드라인이 존재하는 담론을 일컫기엔 너무나도 방대함을 의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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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조각은 조각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들이 무척이나 많다. 궁극적으로 기성품이든 자연물이든, 고체든 액체든 기체든 관계없이 이용되고 있으며 이는 실체적 접근보다는 관념적 형태를 지향하는 습관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한마디로 이제 조각의 영역에서 규정적인 조각은 무의미해졌다.
역으로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고 냄새나 소리나 빛과 같은 비물질적인 요소와 그것을 지각하게 하는 시간, 그리고 사람까지도 조각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일장일단이 있으나 그만큼 사회의 변화에 발맞춰 예술도 여러 면에서 다원화된 세계가 창조된 것이라는 점에서 긍정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과거의 조각들은 모두 버려져야할 구태의연한 산물인가. 그건 아니었다.
아무리 조각의 개념이 확장일로를 걸어왔다고는 하나 최소한의 규칙이랄 수 있는 ‘장소성’과 ‘상징성’이 배제된 것을 조각이라고 말 할 수는 없었다. 뒤샹도 블라디미르 타틀린도 이것만큼은 위배시하지 않았다. 즉 그 어떤 미술가도 미학적인 담론이 가능한 입체적 사물과 공간이 지니는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조각적 본성(The Sculptural Self)이 배제된 것마저 흡수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2.
오늘의 젊은 작가들은 다방면에서 자신의 ‘아이디어’와 씨름한다. 소재를 선택하는데 골몰하거나 돌가루를 마시며 땀을 흘리는 행위는 구시대적 산물처럼 폄훼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개념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진부하다 치부하는 경향도 보인다. 하지만 훌륭한 아이디어는 소수의 몫이었다. 많은 젊은 작가들이 조악하며 밀도 없는 단발성 이미지 생산에만 그쳐 전반적으로 나약한 작품으로 머무는 경우를 종종 목격할 수 있다. 베니스나 광주 등에서 세계적 작가로 호평 받는 실험군의 작가들은 매우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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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란을 통해 언급하는 조각가 노해율은 앞서 말한 전통적인 의미의 조각적 본성을 기본적으로 유지하면서 방법과 재료를 지속적으로 확장시켜간 수없이 많은 작품들과 작가군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한다 .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조각을 접하며 자란 작가는 자연성 및 일상성을 모토로 현대문명이라는 지극히 다원화될 수 있는 주제를 간략하고 동적인 방법으로 표현해 내는 작업을 펼쳐오고 있다. 이미 홍익대학교 조각그룹 정기전 및 각종 국내외 그룹전 등을 통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는 그의 결과물들은 오랜 전통의 순수 조각의 개념들을 나름의 해석으로 받아들이되 내면적 변주를 통해 시선의 이동을 이루려 하는 데 주력하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그가 초창기 제작 발표한 <빛과 소리(light and sound. no: 2001~2003)>시리즈는 공학원리를 이용하여 시각적 움직임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도록 영상화 하면서 동시에 청각적 느낌들을 하나의 공간에 주입하는 방식을 갖고 있다. 기존 조각 작품들이 시각의 변주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면 노해율은 시각 외 청각이 지닌 훌륭한 예술적 가능성을 작품 속으로 끌어 들일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빛과 소리> 연작은 조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영상설치작품에 해당한다. 당시만 해도 그가 주로 다루는 내용은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일상을 재해석 하는 것이었다. 지저분한 작업실이나 거리, 빌딩 등 가공되지 않은 그 자체를 표현하는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의 개념과 유사했다. 그는 일정한 사이클을 반복하는 자동차의 점등이나 속도를 내며 지나는 불빛, 건물의 불빛 등 우리 일상 공간 내 존재해 온 빛의 움직임을 하나의 프레임에 가두고 고유적 선율(청각적 음원들)과 맞물리게 하여 픽셀(pixel)의 단위로 환치 시켰다. 순수한 조각으로서의 접근이나 혹은 비디오조각의 개념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그동안 다루어왔던 조각의 정의를 잠시 미루고 이 같은 작업을 한 이유는 ‘정적인 상태로서의 한계성의 극복과 그로인한 개념의 확산’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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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가 얻으려고 했던 것은 실험적인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메시지의 확장은 물론 매스나 볼륨 등에 국한되어 피동적 상태를 유지하는 조각에 대한 근본의 탈피이다. 다시 말해 이는 1차적으로 수없이 많은 화소로 지정된 모니터 상의 현상들에 대한 연구이며 2차적으로는 실제로 존재하는(존재했던) 현장들이 작가에 의해 전이 된 상태로 남았을 경우 받아들일 수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에 천착한 경우로 여겨진다. 결국 작가의 생각 속에 자리하거나 실제 존재하는 물질을 ‘빛’이라는 비물질적 요소로 연계됨으로서 상호간 알레고리를 형성하게 한다는 것이었음이다.
허나 노해율의 당시 작업들을 좀 더 세세히 분석해보면 70년대 이후 국내 조각계에 불어 닥쳤던 비디오아트나 설치작업과의 관계성을 유추하게 한다. 우선 영상매체(모니터)를 이용한다는 기본조건이 유사하고 움직임(그것이 미디어적이든 아니든)과 소리(신디사이저 등 인공적 음원:sound)에 치중하고 있음이 그의 작품들을 다소 평이하게 만든다. (현재 이러한 작업방식에만 전념하는 여타 작가들을 다수 만나볼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다른 유사한 매체를 활용하는 작가들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간극이 잇다 . 바로   영상 속에서 자라고 보이는 ‘무형질의 조각’에 대한 이해를 빠르게 흡수하고 이를 건설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

 

3.
노해율은 이러한 영상설치작업들을 2004년 이후 중단한다. 식상함에 따른 흥미로움의 감소가 그 주된 이유였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당연한 수순이다. 충분히 넘칠 만큼의 동일 작품들이 존재하고 이들 사이에서 변별력을 갖춘다는 것은 일종의 에너지 낭비이다. 작가는 이를 지혜롭게 체험했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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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전혀 새로운 작업을 통해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조각적 변주를 언급한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장소성’과 ‘상징성’ 측면에서 보다 전통적인 조각의 개념에 다가서면서도 심리적으로 훨씬 안정적이다. 그러면서 작자와 타자에게 동시성을 주문하는 대범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지난해 <홍익조각회>전시에서 선보여 호평을 받았던 스윙(swing)연작들은 ‘새로움을 표출하는 조각’이라는, 기존 작품과는 차원이 다른 설명을 요구해 관심을 끌었다. 주제였던 ‘일상’에서 벗어나 대기와 순환, 자연이나 그 흔적 등으로 표현성은 십분 넓어졌으며 공학매체 자체를 오브제로 하는 작품들이 선보여지기 시작했다. 이전의 영상작업이 하드웨어에 중심을 둔 것이었다면 지금은 구조물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듯하다. 환영이나 가상공간이 아닌 실제적인 것, 전통적 조각의 범주에 보다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4.
그는 감각적이고 일시적인 화면의 이미지들을 버리고 일정한 공간구조를 느끼게 하는 실체적인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작금 선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보기에도 즐거움이 따른다. 전시장을 둥둥 떠다니는 헬륨덩어리들이 가로막이 없음에도 특정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에 많은 관람객들이 신기해한다. 그러나 작가는 즐거움 이전에 전시장을 작품이입의 공간으로 하는 본질적인 요소들을 거둬들이는 데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바람을 일으키는 풍향기나 헬륨을 주입한 비닐, 적당한 기계적 소음마저 작품의 요소로서 받아들이며 개념의 보폭을 한 단계 높여 놓았다.
노해율 작업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스윙’연작에서 비닐 헬륨덩어리가 지닌 볼륨과 무형의 매스는 인위적이지 않은 바람의 영향을 거쳐 비정형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이는 3차원의 공간 속에 구체적인 물질로 구현된 입체로서 양감(量感:volume)의 구성체라는 점, 또한 구체적인 물질을 소재로 하고 도구를 사용하여 3차원적 입체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기존 조각적 가치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가운데 모터를 중심으로 원형의 틀을 끼우고 동일한 회전을 반복하는 장치를 통해 키네틱적인 성질을 나타내기도 한다. 지하철 환풍구에 걸어 놓은 비닐 풍선작품이나 대형 건물 앞 나무에 매달린, 또한 자연 녹지 위에서 말미잘처럼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그의 작품들 대부분이 자유롭지만 반면 일정한 규칙성을 띄는 연구된 결과물들이다. 이제부턴 적어도 철학적 담론이 주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일군의 작가들의 성향을 보면 전통적인 조각적 정의에서 벗어나 미디어의 활용 및 기기의 이용 , 공학적 메커니즘을 적용하여 하나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사례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재기발랄하고 재미있지만, 그래서 잠시 인기는 얻을 수 있지만 철학의 빈곤이 드러나는 흥미 위주의 얄팍한 작품들이 양산되는 부작용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허나 작가 노해율은 점층적 변화를 꾀함에 있어 이러한 양자 간의 의식적, 결과적 문제들을 도외시 하지 않으려 한다. 기능적인 조각과 전시가 목적인 조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에너지를 전달하려함은 실로 다행이다. 특히 즉흥성에서 떨어져 땀과 정열을 느끼게 하는 형상성을 띤 대부분의 조각들이 갖고 있는 작화적 시점을 그의 작품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은 작가 노해율의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주요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