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h HaeYul | 키네틱 아트, 그 속으로 - 미적 관조에서 생명감의 고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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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네틱 아트, 그 속으로 – 미적 관조에서 생명감의 고양으로

글|장민한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과장)

움직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열망으로 등장한 키네틱 아트는 미술 전통에 대한 단절이자 혁신이다. 2차원 평면에 사실 같은 환영을 창조하려는 전통을 ‘환영’이 아니라 실제 ‘움직임’으로 대체했다는 점에서는 단절이고, 색과 형태의 조화와 역동성을 움직임을 통해 극대화 했다는 점에서는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 와서 키네틱 아트가 중요하게 된 것은 단순히 조형적 요소의 역동성을 표현하는데 유리해서가 아니라 관람 주체와 작품의 연속적인 교류 작용을 통해 미적 경험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키네틱 아트는 작품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을 생동감 있게 집중하게 함으로써 그 작품의 움직임을 생명체의 움직임이나 삶의 역동성과 연결시켜 보다 더 은유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우리는 키네틱 아트의 초기 관심인 조형적 요소의 관조보다는 움직이는 오브제가 주는 세상에 대한 통찰에 더 주목하게 되었다. 노해율의 작업도 점차적으로 운동 메커니즘에 대한 미적인 관조보다 움직임이 주는 은유적 의미의 확대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특히 이번 작품 <Moveless>는 한걸음 더 나아가 관람객의 움직임에 의해 추동력을 얻는 오브제의 작업을 통해 움직임이 주는 생동감과 의미를 관람객이 자유롭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노해율의 초기 작업인 <Swing>시리즈에서는 움직임 자체의 메커니즘을 보여주려고 한다. 전동축 위에 올려져있는 여러 형태의 오브제들은 회전을 함에 따라 특이한 방식으로 규칙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각기 다른 형태의 오브제들이 전동축 위에서 그 형태에 따라 각기 다른 리드미컬한 움직임을 산출한다. 살아 있는 생명체의 불규칙하면서도 리드미컬한 몸동작이 연상되면서 그 오브제의 움직임 자체의 미적 속성과 더불어 움직임이 주는 은유적 속성이 관람 포인트가 된다. <General Move>시리즈에서는 작품의 움직임에 관람객이 자신의 감정을 투영한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관객들의 자유로운 연상이 가능하도록 작품을 구성한다. 관람객이 직접 작품에 움직임을 가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관람객이 원하는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이것을 즐기도록 유도하고 있다.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여러 개의 오브제를 한 자리에 배치함으로써 오브제들은 제각기 다르게 움직이고 있지만, 전체를 조망하게 되면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향해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군상들처럼 보인다. 특히, <General surface>는 제각기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여러 개의 사각형 스폰지판을 나란히 배열해 놓음으로써 그 전체는 둔탁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일렁이는 파도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개별 군상들의 소리 없는 외침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보다 더 은유적 속성을 강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번 전시 제목이기도한 <Moveless>는 넘어지지 않게 무게 중심을 하단에 둔 원통형 튜브 수십 개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관람객들은 그 속을 자유롭게 활보하면서 관람객이 가하는 힘에 따라 연속해서 움직이는 원통형 튜브의 일렁임을 감상한다. 모두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원통형 튜브는 내부에 조명을 장착했기 때문에 반투명 표면에 투사되어 램프처럼 자체 발광한다. 전시장 내부는 약한 조명으로 어둡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바다 속에서 옅은 광채를 뿜어내는 산호초 사이를 활보하는 듯한 경험을 한다.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각 튜브는 연이어서 물결치듯이 움직인다. 이전의 전시가 운동 메카니즘과 그것이 주는 은유적인 속성들에 대한 감상이었다면, 이번 전시는 관람객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스스로 작품의 경험을 구성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오브제들의 움직임이 주는 리드미컬할 요소와 동시에 그 오브제들의 움직임이 주는 다양한 은유적 의미가 감상 포인트가 된다.

노해율의 이번 작품은 고정된 미적 관조가 아니라 관람객과 상호작용을 통해 관람자가 스스로 만들어낸 움직임이 주는 생동감을 자유롭게 경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전시장에서 발광 튜브들의 불규칙한 움직임 속의 통일감이 주는 즐거움이 될 수도 있고, 숲 속의 수풀을 헤치고 지나갈 때의 자유로움도 감상의 결과가 될 수 있다. 정지와 움직임 사이의 긴장, 그 긴장감을 헤치고 나갈 때의 해방감, 그리고 관람자 자신의 에너지에 의해 촉발된 오브제들의 활력 있는 움직임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무엇이든 관람자가 스스로 움직임을 만들어서 도출된 결과이다. 움직임과 그것을 통해 얻는 환경의 변화, 그것을 온 몸으로 경험하면서 관람자는 스스로가 살아 있다는 생명감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관람객 자신이 만들어낸 움직임과 그에 생생한 반응을 통해 자신의 생명감이 확충되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노해율의 이번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매력은 움직임 자체가 주는 관조적 즐거움이라기보다 작품의 생동감에서 얻는 생명감의 고양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