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h HaeYul | 균형을 찾아가기 또는 미적형이상학의 세계로 진입하는 키네틱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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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을 찾아가기 또는 미적형이상학의 세계로 진입하는 키네틱아트

글|김노암(아트스페이스 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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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나 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고립된 특정 공간 또는 특정 문화를 벗어나지 못하는 문화의존증후군을 일본에서는 ‘도지코모리’라고도 하고 ‘히키코모리’라고도 부른다. 이 은둔형 외톨이현상은 개별적 개인의 문제가 아닌 전형적인 사회문제이자 사회현상인 것이다. 키네틱에 몰두하는, 그러니까 특정 운동과 그 심미적 효과에 몰입하는 것 또한 사회적이다. 키덜트처럼 몸은 어른이지만 어린아이의 취향과 몰입을 버리지 못한 현상도 실상 개별적 취향이 아닌 사회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이 진정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의식적이며 담론화 과정을 동반해야만 하는데, 그런 과정 속에서야 비로소 사회적인 관계와 시각과 평가의 문제 선상에 놓이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키네틱아트는 아직까지도 이런 히키코모리나 키덜트와 유사한 시각에서 다뤄지는 것이 현실이다. 몇몇 예외적인 작가들 제외하고는 키네틱아트에 대한 관심과 담론의 수준이라는 것이 매우 피상적일뿐더러 그 무의식적 층위에서는 다른 예술형식에 비해 미적형이상학적 차원의 담론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더욱이 과장하자면 몇몇 성공적인 작가로 인정받는 키네틱아트 작가들도 해외의 호평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국내에서 인정받는 소위 미적 식민주의나 사대주의의 영향 하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심미적 환경에서는 진지한 작가가 있어도 제대로 조명할 수 없을뿐더러 성찰적 담론은 애초에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조건이나 환경도 창작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니, 이 모든 상황은 오롯이 예술가의 몫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키네틱아트 작가들의 작업과 그 성장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예술은 결국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게 하는 것이다. 키네틱아트는 그것을 동역학과 정역학의 관계 속에서 모색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소위 내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심미의 세계를 운행하는 행위는 그 명칭이나 형식이 무엇이 되었건 본래적 맥락의 예술의 범주에서 다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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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해율의 개인전을 소개하는 사진이미지를 보면 청계천 세운상가를 지나면 대낮에도 어두운 기계부품가게들이 늘어서있다. 이벤트전문점의 간판과 소형영업용 차량인 다마스를 배경으로 조명이 켜진 오브제가 20도 정도 기울어져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까닭에 한동안 서서 보지 않으면 움직임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이다. 콘크리트 바닥 위에 서 있지만 마치 어두운 바다 위 부표처럼 둥둥 떠 있는 인상이다.

이 이미지는 단지 키네틱아트가 현대미술의 가장 유희적이며 이해하기 용이하다는 인식과는 달리, 매우 사회적이며 심리적인 미적 인상을 주고 있다. 우리는 이 이미지에서 더 이상 운동이 주는 쾌락적 요소에 기울어지지 않는다. 한 방향으로만 기울어지던 감각과 정서가 다른 방향으로 천천히 이동하며 새로운 균형점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노해율의 작업은 키네틱아트의 기계적, 공학적 운동의 차원이 심미적, 해석적 차원으로 확산하여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키네틱아트에 대한 선입견과 평면적 인식을 해체하고 교정하는 것이다. 작가는 키네틱 아트를 사회적 매체와 형식으로서 이해한다.

그의 작업은 오브제와 오브제의 결합과 역학, 동역학과 정역학이 심미적으로 용해되면서 사변적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더 이상 정교한 설계와 제작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동어반복일 뿐이다. 결국에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언어화하고 공유할 수 있는지의 문제로 전환한다. 언어화하지 못하는 것은 대상화되지 못한다. 사유될 수 없는 자리에 머무는 것이다. 동역학의 세계에서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만들어내는가가 좋은 작업의 미적 효과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오랫동안 운동과 균형의 심미적 뉘앙스를 찾는 작가의 지난 과정이 비로소 어떤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의 근래 작업에서 나타나는 변화는 매우 유의미하다고 보인다. 그의 작업이 인상적으로 도약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미술계의 키네틱아트라는 영역의 진화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예술계의 풍경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역설적이게도 전통적으로 진지한 형식으로 인정 받아온 예술분야가 제자리걸음을 걷는 동안 20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정신과 매체의 활동이 비약적인 모험과 비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