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h HaeYul | one stroke : 운동성의 촉발 – 최혜미(예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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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해율, noh hae yul, 작가, artist, art, 조각, sculp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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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stroke : 운동성의 촉발 – 최혜미(예술학)

05_one stroke-01(전체사진)“타닥.” 주말 오후 집에 혼자 있는데 뭔가가 창문에 부딪쳤다. 무심히 넘기기에는 제법 큰 소리였다. 다행히 창문이 깨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무엇일까? 누군가 던진 돌멩이일까? 그런데 그 ‘단 한번’ 일어난 사건이 내 마음에 일으킨 불안이 만만치 않았다. 한동안 내 눈과 귀는 온통 창문 쪽으로 향하여 작은 변화의 조짐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무엇보다 내 몸은 언제 창문으로 날아올지 모르는 뭔가를 대비하여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 긴박한 상황은 5분 남짓 지속됐다. 그 시간동안 창문은 늘 있던 그대로 있었고 그 주변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5분 남짓의 시간을 ‘적막의 시간’ 또는 ‘부동(不動)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창문 역시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때 모든 것은 ‘운동’의 상태에 있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타닥.” 한동안 내 마음 속에서 발생한 불안은 모두 이 단 한번 발생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나는 정지된 것을 그저 정지된 것으로 볼 수가 없었다. 주변은 조용했으나 그저 조용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노해율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정지된 상태의 운동성’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원 스트로크one stroke’라는 이름이 붙은 노해율의 최근 전시에 등장한 작품들에서 ‘정지된 상태의 운동성’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전시 제목에 등장한 ’원 스트로크‘란 정지된 상태에 ‘운동성’을 촉발시킨 어떤 사건이나 계기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그것은 한때 내 마음을 불안하게 했던 “타닥” 소리 같은 것이다.

‘원 스트로크’에 등장한 ‘one stroke-01’(2015)은 육면체 형태의 사각 파이프 기둥들을 바닥에 세워놓은 설치 작업이다. 사각 파이프 기둥들이라고 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사각이 아니다. 파이프들 모두 상단 어디쯤이 45도로 어슷하게 잘려있고 잘린 윗부분은 파이프 안쪽에 장착된 전동장치를 동력으로 삼아 시계방향으로 회전한다. 전동장치의 상태, 파이프의 무게와 마찰에 따라 파이프 상단 각각의 회전은 제각기 다른 각도, 다른 속도로 진행된다. 바닥면과 수직을 이루는 기점에서 회전운동을 시작한 상단 부분은 꺾이는 각도에 따라 무게중심이 위에서 아래로 교차되며 느리게 또는 빠르게 회전한다. 이 작업은 내 마음에 어떤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one stroke-01’은 완벽한 육면체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잘린 상단 부분의 회전이 시작되면 그 육면체의 형태가 깨진다. 그 순간부터 나는 이상하게도 완벽한 육면체를 기다리는 처지가 된다. 그것이 한 바퀴 돌아 완벽한 육면체가 되려면 40~50초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 시간은 완벽한 육면체를 기대하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과거 폴 세잔이 감당하고자 했던 상황이 이와 유사할 것이다. 세잔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원통, 구, 원뿔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목표다. 나는 사물의 구조를 굳건히 재건하고 싶다.” 완벽한 육면체의 귀환을 기다리는 내 마음은 사물의 구조를 굳건히 재건하고자 했던 세잔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세잔에게서 그것이 탐구의 대상이었다면 나에게 그것은 기다리면 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완벽한 육면체를 얻는 순간 그것은 깨진다. 그것이 나를 애타게 한다. 충족은 잠시 뿐이고 대부분의 시간은 내게 기다림과 집착의 시간이다. 나는 어느 시점에서 ‘one stroke-01’이 회전운동을 중단해도 그 기능을 넉넉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단과 하단이 어긋난 상태로 정지해 있다면 완벽한 육면체를 기다리는 마음의 운동을 촉발할 것이고, 상단과 하단이 꼭 맞춰져 있는 상태, 즉 육면체의 상태로 정지해 있다면 그 완벽한 형태가 곧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을 촉발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운동은 ‘원 스트로크’로 시작된다고 해야 한다. ‘one stroke-01’에서 원 스트로크란 처음으로 완벽한 육면체가 갈라져 “끽끽”(금속 마찰음을 내 나름으로 표현한 것) 어긋나는 순간이다.
‘one stroke-01’에서 이야기한대로 ‘원 스트로크’가 촉발하는 운동은 변하는 것에서 불변하는 것을 찾고, “부동성을 가동성의 한 단계로 지각하는”(루돌프 아른하임) 마음상태와 관계가 있다. 여기서 운동은 매우 심리적이다. 물론 그 심리는 신체의 지각경험과 불가분의 관계다. 점멸하는 전구들 사이에서 불빛이 여기저기 움직이는 것 같은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Balance-03’(2015)은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가현운동apparent movement을 구체화한 작업이다. 가현운동은 여러 광점(光點)이 적당한 시간 간격으로 점멸하면 하나의 광점이 그 사이를 움직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여기서 운동은 전적으로 지각적이고 심리적이다. 그 운동은 하나의 불빛이 점등할 때 준비상태로 되고 다음 불빛이 점등하면 본격화된다. ‘Balance-03’에서는 그 두 번째 점등이 ‘원 스트로크’이다. 가현운동은 영화의 심리적 조건이기도 하다. E. 파노프스키의 말대로 영화는 정지해 있는 것에 움직임을 덧붙여서 성공을 거둔 예술형식이다. 그래서 영화의 별칭 가운데 하나는 모션-픽쳐motion picture이다. 최초의 영화는 정지된 상태(픽쳐)에 운동성(모션)을 촉발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예술형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노해율의 전시제목 ‘원 스트로크’는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번역어의 선택은 ‘원 스트로크one stroke’의 사전적 의미를 간직하면서 동시에 그의 전시와 작품 성격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전에 등장하는 스트로크의 의미에는 ‘타격, 치기, 부딪힘, 일격’ 등이 있다. 심지어 이 단어는 ‘뇌졸중’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어떤 것이든 이 단어는 나와 세계 간의 어떤 강력한 접촉을 암시한다. 그러나 노해율 작업에서 그 접촉의 심리적 함의를 살리려면 역시 “한 번 움직임”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번역은 그 ‘한 번 움직임’의 물리, 신체적 강도intensity를 나타내기에 부족하다. 앞서 우리가 보아온 대로 원 스트로크는 정지된 상태에 운동성을 촉발시킬 정도로 강렬한 심리적 경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