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h HaeYul | Self-Action, 물질과 상상(想像)의 관계맺음에 대하여 – 이문정(조형예술학 박사, 중앙대학교 겸임교수)
Noh Hae Yul Portfolio
노해율, noh hae yul, 작가, artist, art, 조각, sculpture
506
single,single-post,postid-506,single-format-standard,ajax_fade,page_not_loaded,,select-theme-ver-3.0.2,wpb-js-composer js-comp-ver-4.11.2,vc_responsive

Self-Action, 물질과 상상(想像)의 관계맺음에 대하여 – 이문정(조형예술학 박사, 중앙대학교 겸임교수)

SONY DSC

SONY DSC

한계도 제한도 없는 몽상 속에서, 몽상가는 자신을 매혹한 우주적 이미지에 몸과 정신을 바친다. 몽상가는 하나의 세계 속에 있으며, 그는 그것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유일한 우주적 이미지가 그에게 몽상의 통일성, 세계의 통일성을 준다. 다른 이미지들이 이 최초의 이미지로부터 발생하고, 결합하며, 서로를 더욱 아름답게 해준다.
Gaston Bachelard, La Poetique de la Reveri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78, p. 150.

대부분의 예술 작품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갖는다. 현실의 삶과 예술적 삶이 결합된 이 독특한 세계는 현상적인 사실뿐만 아니라 내재적 본질과 작가적 상상을 담아낸다. 따라서 그것은 진실과 허구, 개인 혹은 사회, 그리고 한 시대의 일부 혹은 전체를 담아내는 하나의 우주와 같다. 작품이라는 하나의 우주 안에 존재하는 부분들은 다른 부분들과 관계 맺음을 하며 스스로를 완성시키고, 그렇게 만들어진 하나의 작품은 현실 세계 속의 부분으로서 또 하나의 관계 맺음을 창조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관계 속에서 서로는 서로를 더욱 아름다운 우주로 만들어 간다.
노해율은 주도면밀하게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어 내는 작가이다. 그가 만드는 우주는 치밀한 수학적 사고와 무한한 몽상을 동시에 실현시켜 현실과 상상, 존재와 세계를 넘나들며 서로를 연결시킨다. 압축된 형태와 절제된 표현은 관람객의 상상력을 극적으로 이끌어내어 그 예술적 가치를 더하고 물질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결합시킨다. 작가는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 그리고 관계 맺음을 위한 상상력을 최고조로 발휘시키기 위해 양가성(ambivalence)에 주목한다.
노해율의 신작 <Self-Action> 시리즈(2015)는 다양한 층위의 양가성을 통해 예술적 상상을 시도한다. 노해율의 우주는 우리에게 질서와 무질서, 필연과 우연, 명료성과 모호성이 공존하는 지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유희를 선사한다. -일정한 기준에 의해-단일하고 명확하게 정형화된 세계는 그것에 길들여진 우리들에게 일정한 안정감과 평온함을 제공한다. 그러나 작가에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처음부터 하나의 의미로 정리될 수도 분류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작가는 양가성,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무한한 상상력이야말로 세계의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이라 믿는다.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표현을 빌리자면 양가성은 상상을 위한 기본 원칙이다. 또한 물질적 상상력이 일어나는 모든 근원적 물질은 생명과 죽음, 선과 악, 밝음과 어둠, 욕망과 두려움처럼 모순된 성격을 동시에 함유하며 이러한 양가성이야말로 세계 전체를 담아낼 수 있다.
이번 연작에서 노해율이 보여주는 작업들은 물질성의 극대화를 통한 정신-상상-의 극대화, 우연성과 필연성의 공존, 그리고 그것을 통한 존재와 존재, 존재와 우주의 관계 맺음에 대한 탐구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물질과 정신, 물질과 상상력의 결합이다. 물론 과학 기술을 이용한 키네틱 아트(kinetic art)는 이미 그 자체로 물질과 작가의 내면 혹은 감성의 만남이라는 양가적 결합을 전제한다. 그러나 노해율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물질과 정신의 결합은 조금 다른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총 여섯 점의 <Self-Action> 시리즈를 살펴보면 모든 작가적 표현이 최소화되어 물질로서의 재료와 사물의 물리적 움직임 그 자체가 강조된다. 45도 각도로 두 번, 90도 각도로 한 번 구부려 벽에 고정한 파이프(pipe)에 원통 형태와 직육면체 형태의 파이프가 매달려 지속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Self-Action-01>과 <Self-Action-02>에서부터 링(ring) 형태와 사각 형태의 파이프에 각각 구멍을 뚫고 그 안에는 LED(light emitted diode) 조명을 넣어 빛이 반복적으로 파이프 안을 이동하도록 만들어진 <Self-Action-03>와 <Self-Action-04>, 빛을 발산하는 반구 형태의 <Self-Action-05>, 반복적인 회전 운동을 통해 영어 대문자 ‘I’와 ‘L’을 완성하는 직육면체 형태의 <Self-Action-06>에 이르는 전(全) 작품들은 가장 적은 재료, 적은 노동력, 최소한의 가공과 에너지(energy) 소모를 계산하여 제작된 것이다. 이것은 최고의 효율성을 위한 것이자 존재의 본질, 즉 재료의 본질과 움직임의 본질에 가까워지기 위한 작가적 노력이다. 상상을 위한 물질의 근원을 지키기 위해 노해율은 자신이 사용하는 주(主) 재료인 철(iron), 알루미늄(aluminium), LED의 기본 속성과 형태를 최대한 보존한다. 작품의 부분들을 연결하는 볼트(bolt)의 흔적도 감추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물질은 정신, 영혼과 대비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작가에게 이러한 정의는 무의미하다. 오히려 물질은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이끌어 주며 작가를 몽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동력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해율이 생각하는 작가적 몽상은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다. 또한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물질들을 일반적인 명칭으로 불리는 평범한 사물들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단초(端初)이다. 이에 노해율은 바슐라르가 물질이 시인(詩人)을 자유로운 세계로 진입시키는 시(詩)적 몽상의 필수 조건이라고 말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물질의 내면성을 포착하여 작가의 상상력을 최고조에 이르게 하고, 현실 속의 일상적인 물질이 담아내는 세계의 본질을 꺼내기 위해 노력한다.
따라서 <Self-Action>에 등장하는 어떠한 장식적 요소나 설명도 없는 –마치 모더니즘(modernism) 조각을 연상시키는-직육면체, 원기둥, 반구와 같은 기하학적 형태는 그 어떤 구체적인 형상보다도 많은 존재들을 상기시킨다. 시각적으로 절제되었다고 해서 부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 많은 상상을 하게 한다. 가장 단순한 형태는 가장 다양한 형태의 가능성을 함유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형태는 선입견을 만들어 상상력을 제한하지만 최소한의 형태로 이루어진, 순수한 물질로서 존재하는 노해율의 작품들은 다양한 이미지(image)들의 생산을 가능하게 만드는 근원으로서 존재한다.
한편 작가의 손길과 세부 묘사가 극도로 절제된 작품의 겉모습은 관람객이 움직임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키네틱 아트의 본질은 움직임, 그리고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라 믿기에 노해율은 운동의 근원을 경험시키는 데에 주력한다. 작가는 자신의 키네틱 아트가 움직이는 신기한 예술품, 과학적 발명품, 혹은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장난감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만약 화려한 이미지나 세부 묘사가 감각적으로 현혹시킨다면 관람객들은 움직임에 집중하기보다 그 화려함 자체에 매혹될 것이다. 만약 지나치게 현란한 최첨단의 기계 장비가 두드러진다면 정서적 경험을 할 기회를 놓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노해율은 최소한의 이미지와 기능성에 집중한다. 작품을 단순히 형태적인 차원에서 판단하는 것으로는 예술이 선사하는 몽상의 세계를 절대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최소한의 표현을 위한 노해율의 작업 과정에는 상상할 수 없는 복잡한 과학적 계산과 철학적 고민이 압축되어 있다. 그것들은 무심하게 놓여있는 것 같지만 무심하지 않는 작품들이며 가공되지 않은 것 같지만 무수한 –물리적, 심리적-가공의 단계를 거친 작품들이다. 작품들이 보여주는 움직임 역시 철저한 계산을 토대로 한 것이며 계획된 궤도(軌道)를 정확히 따른다. 작가는 이 모든 과정 역시 세계와의 관계 맺음이라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노해율의 작품에 담긴 우연 같은 필연, 무계획 같은 계획이라는 또 하나의 양가성을 확인하게 된다.
노해율은 자신의 작품을 ‘다양한 변수 속에서도 필연적으로 한 지점에서 만남’이라 정의한다.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과 함께 협업하는 과정에는 상상할 수 없는 변수가 존재한다.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실험, 다양한 움직임의 시도 역시 매번 다른 변수를 전제한다. 그리고 그 변수들만큼 새로운 관계 맺음이 이루어진다. 작가는 작업 과정 중에 만나게 되는 수많은 변수 속에서 필연을 찾아낸다. 찾아내야 한다. 가끔 작가는 필연을 찾아내기 위해 변수를 조절하기도 하며 제한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든 변수는 최종적으로 작품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우연히 발생되는 모든 변수는 관계 맺음의 가능성이라는 말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들은 세계의 다른 부분들과 긴밀히 연결된다. 우리는 모두 우연적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창조해 나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공존만큼 세계의 본질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노해율의 작업 과정이 그렇듯 다른 존재들과의 긴밀한 관계 맺음 속에서 우리의 삶을 선택적으로 창조하며 만들어간다.
사실 <Self-Action> 시리즈는 작가의 개인사와도 깊이 연결된다. 작가는 스스로 움직이는 작품들에 자신을 대입시키며 <Self-Action> 시리즈를 진행했다. 노해율은 작가의 삶과 작품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연결되어 있으며, 작가의 상태가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작품은 작가의 삶이 세계와 관계 맺음을 하는 하나의 장(場)이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작가는 항상 작업을 하면서 자신의 내적이고 외적인 상황을 되돌아보기를 반복한다.
얼마 전까지 작가는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살아가는 것을 중요시했다. 운명론적인 태도를 갖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삶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어떻게 보면 수동적으로-관계 맺기를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언제인가부터 작가는 스스로 상황을 만들어나가고 개척하여 삶의 흐름과 관계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변화를 반영하듯 움직임의 에너지인 전기 장치가 작품 내부로 들어가게 되었다. 자기 안에 움직임의 근원이 있어 그 스스로 우주와 관계 맺음을 하고 그 스스로 물질, 에너지, 움직임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을 만들게 된 것이다.
작업을 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작가는 고민하고 의견을 조율하며, 재료를 선택하고 파이프를 구부리며, 용접을 하고, 모터(motor)를 부착하는 작업 과정뿐만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존재인 관람객을 만나는 과정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관계 맺음을 중요시하기에 작가적 몽상에만 주목하지 않는 것이다.
노해율의 작은 우주에 들어서는 관람객은 상상력의 울림을 통해 작가와 소통하고 물질의 근원을 마주하는 정신성의 체험, 그것을 통한 세계와의 관계 맺음에 동참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예술적 몽상에 빠진 관람객은 자신이 마주하는 대상의 변화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는 무한한 상상의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이제 전시장은 작가와 관람객 사이의 상상력이 서로의 울림을 전달하는 또 하나의 우주로 진화한다. 그것은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고 결합시키고 서로를 상상한다. 그리고 서로를 더욱 빛나게 한다.(끝.)